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욘 라베 (문단 편집) === 귀국과 여생 === 이 훈훈한 이야기에는 씁쓸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욘 라베는 독일로 돌아간 후에 이 일을 보고했으나 [[게슈타포]]에게 붙들렸고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는 본인에게 도달하지도 못했다는 걸 알게 된다. '''정작 히틀러는 욘 라베라는 자가 자신한테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관해서 편지를 썼다는것 자체를 몰랐다. 일본군이 난징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도.''' 게다가 히틀러는 욘 라베가 적국을 도왔다는 말까지 하였다. 안 그래도 소련 때문에 [[일본 제국]]이 소련의 뒤통수를 치게 하려고 비위를 강제로 맞춰주려다 보니 난징 대학살의 경위와 중립 위원회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한 귀중한 자료였던 [[일기]]는 출판이나 공개가 금지되었고 라베는 종전까지 [[베를린]]의 지멘스 본사에서 일했다. 심지어 전후에는 나치 당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영국군]]에 차례로 체포되었다가 지멘스 본사의 중재 덕에 간신히 무죄로 풀려났다. 나치 당원이기는 했지만 전쟁 범죄 같은 반인륜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인증을 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날리고, 가족조차 부양할 수 없는 알거지가 된다. 그나마 1946년 6월에 비(非)[[나치]]화 선언을 받긴 했지만 어려운 형편은 여전하였다. 그러다 [[1948년]]에 라베 일가의 참상을 전해 들은 난징 시민들이 모금해 돈과 음식을 보내주었는데, 이는 난징시 시장이 직접 찾아가서 전달하였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당시 중국인들이 전해준 돈이 미국 달러로 2,000달러였는데, 1949년 기준 미국 평균연봉이 대략 3,600달러였던 데다가,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고작 2만 5천 달러도 되지 않아 정부 차원에서 모금한 돈이라 하기에는 푼돈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건 '''일본의 침략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에 [[국공내전|내전]]까지 겹치며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 경제 수준이 바닥을 기던''' 중국에서 어렵사리 모금된 돈이다. 그 외에도 난징시 시장이 스위스를 거쳐 독일을 여행하면서 많은 음식을 사들여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하며, 난징 시민들도 그가 사망하는 1950년까지 음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에 라베는 편지를 보내 감사를 표시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라베는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한 채로 [[1950년]] 1월 5일에 베를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샤를로텐부르크 지구의 빌헬름 황제 기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97년에 라베의 묘비가 유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난징으로 옮겨졌고 라베 일가가 난징에서 살던 집은 욘 라베와 민간인 안전구역 기념관이 되었다. 난징 대학살 당시 그가 남겼던 일기는 [[영어]]로 번역되어 '난징의 의로운 이(The Good Man of Nanking)'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발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